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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홍차 강국으로 만든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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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영국 콘월카운티의 차밭. 이곳에서 생산된 차가 요즘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photo dailymail.co.uk차 생산국가도 아니었던 영국이 전 세계 홍차 문화와 시장을 주도할 ...

영국을 홍차 강국으로 만든 흑역사

영국 콘월카운티의 차밭. 이곳에서 생산된 차가 요즘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photo dailymail.co.uk


차 생산국가도 아니었던 영국이 전 세계 홍차 문화와 시장을 주도할 수 있게 된 단초는 인도에서의 차 생산이었다. 인도에서 차를 생산함으로써 중국의 차 독점을 깨버린 것이다. 이는 세계 차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야망에서 시작됐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을 보면 동인도회사 군대는 해적보다 더 나쁜 빌런으로 묘사된다. 식민지에 파견된 총독도 마음대로 감금하는 등 그들이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악의 축으로 그려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개 주식회사가 국가라면 져야 할 책임은 면제받고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남용해 무력으로 획득한 영토에서 약탈과 세금징수까지 벌였던 흑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상 제일 부도덕하고 부끄러운 전쟁이었다고 영국인 스스로가 반성하는 '아편전쟁'도 동인도회사가 차 때문에 벌인 전쟁이었다. 영국 왕실보다 더 많은 해외영토를 소유하고 식민지를 실질 지배한 동인도회사는 1600년 12월 31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받아 설립됐다. 동아시아와 인도 무역독점권을 허가받은 칙허기업(勅許企業)으로 출발한 셈인데, 초기 자금조달 방식은 일회성이었다. 항해 때마다 자금을 조달받고 배당하는 방식은 1년3개월 늦게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견주면 후진적이고 옹색했다.

네덜란드 누르고 중국 차 수입 독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유대인들이 투자한 기초자본금이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기업인 동시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로서 네덜란드를 '황금시대'로 이끌었다.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유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을 매매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자산을 현 시가로 따지면 8조달러가 넘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자산을 가진 기업집단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독점한 향신료를 중개무역으로 수입하던 영국은 자신들의 동인도회사를 아시아에 진출시켜 직접무역을 하고 싶었으나 포르투갈과 스페인도 제압한 네덜란드의 위세에 눌려 한물간 교역품인 인도산 후추에 만족해야 했다. 더욱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 3월부터는 따끈한 신상품인 중국 차를 수입해 유럽과 신대륙에 보급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파 정부는 해상무역을 독점하던 네덜란드에 타격을 주기 위한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1651년 공포했다. 하지만 영국은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네덜란드에 번번이 패했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3차에 걸친 전쟁에서 패하며 대항해시대의 일원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세계 역사상 첫 무역전쟁에서 패했지만 나름 성과도 있었다. 1689년 동인도회사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 차를 직수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680년대부터 더욱 강화된 징병권과 교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주의 첨병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선점한 중국 차 시장을 보란 듯이 잠식해 들어갔다. 완벽한 세계 해양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영국은 결국 1781년 네덜란드 해안을 포위하며 일으킨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굴복시킨다. 대패한 네덜란드는 1784년 항복을 선언한다.

피의 대가로 중국 차 수입 주도권을 완벽하게 확보한 영국 동인도회사는 유럽 전체에 차 문화를 확산시켰다. 남성만 출입이 허용되는 커피하우스 대신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티가든(Tea Garden)이 유럽 사교 문화로 번성하며 여성 인권 신장에도 일조했다. 급기야 향신료와 비단을 누르고 차가 교역품의 주인공이 됐다.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전 국민이 매일 무시로 차를 마셨다. 중국 차 수입대금을 은 대신 아편으로 충당하던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두 차례의 아편전쟁까지 치렀다. 동인도회사는 아편전쟁에서 완승한 후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청나라 유통조직이 양귀비를 직접 재배해 불법 제조한 아편을 저렴하게 유통하는 바람에 헐값이 된 아편으로는 비싼 차를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홍차 수급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했던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직접 홍차를 생산하려는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플랜A는 브루스(Bruce) 형제가 차나무를 발견한 인도 아삼 지역에서 차나무를 키워 홍차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브루스 형제에게 묘목과 씨앗을 제공해준 아삼 지역의 싱포족은 차를 마시고 찻잎을 식용으로 활용하는 데 능숙했다. 원래 차 생활에 익숙한 중국 운남성(雲南省·윈난성)에서 살던 경파족(景颇族)이란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삼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중국 운남성의 대엽종 차나무를 가져와 키웠다. 영국인이 인도에서 보았던 소엽종 차나무가 아닌 대엽종 차나무가 이들에 의해 토착화되며 변종이 생겼고 이 야생화된 차나무를 브루스 형제가 연이어 발견한 것이다.

인도를 차 종주국으로 만든 동인도회사

운남성 대엽종 차나무의 변종을 새로운 아삼종 원종으로 환골탈태시켜 차 종주국을 인도로 만들려는 동인도회사의 야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자급자족과 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변종을 원종으로 격상시켜 종주국 위상확보와 원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은 후발주자로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아삼 지역에서 이미 차를 재배해오던 찰스 브루스가 생산한 첫 번째 차 상품은 1838년 런던으로 선적되어 1839년 1월 경매에 부쳐졌다. 첫 인도산이라는 '희귀템'으로 판매에 성공했으나 맛과 품질은 중국 홍차와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이었다.

10년이 지난 1848년 1월까지도 만족할 만한 아삼종 홍차를 만들어내지 못한 동인도회사는 차나무 해외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청나라에 산업스파이를 밀파해 차나무와 종자를 훔쳐 인도로 가져오는 플랜B를 가동했다. 당시 산업스파이로 낙점된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은 영국왕립정원협회 소속 식물학자로 중국 지리와 중국어에 능통한 플랜트 헌터였다.

로버트 포춘은 세계 최초의 홍차인 정산소종(正山小種)이 태어난 중국 복건성(福建省·푸젠성) 무이산(武夷山)을 누비며 묘목과 종자를 구해 인도로 보냈으나 운송 도중에 곰팡이가 펴서 활착에 실패했다. 무이산에 다시 밀파된 로버트 포춘은 차나무 묘목 2만 그루와 종자를 구하는 한편 차나무 재배 기술과 제조 기술도 한 스님으로부터 배웠다. 이후 홍차 제조기술자 8인을 포섭해 묘목과 함께 아일랜드 퀸호에 탑승시켜 1851년 인도로 보냈다.

이후 동인도회사 소속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박사의 노력으로 중국산 차나무 1만2828그루가 해발 2045m 다르질링 고원지대에 뿌리내렸다. 종자에서 발아한 새싹도 대량증식에 성공하며 1860년부터 상업적 가치를 가진 다르질링 홍차가 출시됐다. 이 무렵 아삼 지역에서도 양질의 홍차가 대량생산되며 중국이 독점하던 홍차 산업의 주도권을 드디어 동인도회사가 거머쥐게 됐다.

'차 산업의 주역이 되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동인도회사에 의해 홍차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스리랑카를 비롯해 아프리카 케냐 등지에서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사라진 동인도회사가 남긴 유산 덕분에 영국이 차 생산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최근에는 영국 남부 콘월카운티의 트레고스넌(Tregothnan)의 차밭에서 생산된 영국산 차가 중국으로 수출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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